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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시작... 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아무일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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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딤섬 2019. 9. 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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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시작된 건 1964년 3월 24일이다. 석 달 뒤인 6월 3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이듬해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했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일회담반대진영의 요구: (당시 야당과 시민단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매국 외교 중지
  2. 평화선 양보 불가 (한국이 정한 어로 구획)
  3.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 반대

   대안으로는

  1. 대일청구권 27억 달러
  2. 전관수역 40마일

   1964년 6월 3일: 서울 시내 1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며 도심으로 전진했다. 서울 시위대에 힘입어 각 지방에서도 시위가 진행됐다.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향해 달리기까지 했다. 

   

   정부, 미국 대사, 유엔군 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해 그날 밤 계엄령을 선포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55일 동안 구속된 학생 수는 168명, 민간인은 173명, 그리고 언론인 7명으로 총 348명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진행된 한일회담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두고 한국, 베트남, 대만, 필리핀을 배후로 두려는 미국의 그림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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