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시작된 건 1964년 3월 24일이다. 석 달 뒤인 6월 3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이듬해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했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일회담반대진영의 요구: (당시 야당과 시민단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안으로는
1964년 6월 3일: 서울 시내 1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며 도심으로 전진했다. 서울 시위대에 힘입어 각 지방에서도 시위가 진행됐다.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를 향해 달리기까지 했다.
정부, 미국 대사, 유엔군 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해 그날 밤 계엄령을 선포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55일 동안 구속된 학생 수는 168명, 민간인은 173명, 그리고 언론인 7명으로 총 348명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진행된 한일회담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두고 한국, 베트남, 대만, 필리핀을 배후로 두려는 미국의 그림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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